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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날 좀 잡아줘

쀼뺩쁍뺘 2016. 11. 12. 21:07

평소랑 똑같은 아침이었다. 알람 소리를 듣고 아침엔 특히 무겁게 느껴지는 팔을 들어 끄고 나서 기지개를 펴고 눈 한 번 깜빡인 뒤에 이불에서 나온다. 화장실로 가서 볼일을 보고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나와서 로션을 바르고 교복을 입고, 다녀오겠습니다~.


  
 "헤이 헤이!! 아카아시!!!"
 배구를 할 때도 마찬가지. 언제나 똑같아야 하는데, ...
 모르겠다. 항상 하던 어깨동무도, 멋지게 공격에 성공해서 하는 하이파이브도, 축 처져서 나에게 오는 것도, 웃으면서 오는 것도, 이건 습관인가 하고 넘기던 머리 쓰다듬는 것도, 아카아시라 불리는 것도, 그냥 보쿠토상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언제부터 이렇게 설레는 거였는지. 떨리는 거였는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땅만 보고 있으면 보쿠토상이 와서 왜 그러냐고 어깨에 손을 올리면 덥고 공기가 답답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 맞다. 그때부턴 거 같다.
 보쿠토상 반에 밖에서 만나면 나 남자예요~ 하고 다니지 않는 이상 당연히 여자라고 생각할 법한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 머리 색이 흰색이었다. 언제가 동아리 때 머리끝이 하얗게 물이 들어와서는, 그 녀석이 전학을 갔는데 내가 그 녀석을 좋아했었던 거 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머리가 완전 새 하얘져서 다녔었는데 요즘 다시 머리색이 돌아오고 있는 듯해 보였다.
 으 그니까 요점은 이게 아니라,
 방학 때 언제나처럼 합동 연습을 하고 씻고 자려고 누워서 옆에 있는 보쿠토상 머리를 봤는데 저 머리색이 내 머리 색이랑 같아지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하하 어차피 같은 머리색인데 신경 안 쓰면 티도 안 나려나? 아, 그럼 지금 상태에서 물들기 시작하면 위아래로는 까만데 중간만 하얗겠네? ㅋㅋㅋㅋ 그거 되게 웃기겠다. 하다가 보쿠토상이 자신의 원래 머리색 보다 더 쨍한 검은색의 머리를 하고 나에게 고백을 해서 연애를 하고 키스하는 상황까지 갔다는 거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내가, 그니까 내가! 보쿠토상을 좋아하고 있다는 거지... 내가, 보쿠토상을.
 그래도 합숙이 있고 나서 몇 주가 지났는데도 머리색은 아직 그대로니까 다행스러워하고 있었는데 뒷자리 애가,
 "아카아시.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머리끝에 4분의 1 정도가 다른 머리 색보다 옅어!"
 이러는 거야... 말도 안 돼.
 실력은 정말 손가락 다섯 개 안에 들어갈 정도로 좋은 솜씨라지만 성가시고 귀찮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는데 사랑이라니! 심지어 보쿠토상의 머리끝은 아직 흰색인데...



-



 "아카아시! 요즘 왜 그래?? 계속 힘이 없어!!! 그래도 우리 아카아시의 실력은 그대로지만!!!"

 인터하이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질 뻔했지만 마지막에 보쿠토상의 페이크로 이길 수 있었다. 좋았다. 너무 좋았다. 아직까지, 몆 달이 다 되도록 고백도 못 하고 끙끙 거리고 있는 거만 빼면.
  벌써 쨍한 검은색이었던 머리도 조금 옅은 검은색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뭐, 자세히 신경 써서 평소 나의 머리카락 한올 한올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티도 안 나지만.
 이게 문제다, 이게. 차라리 보쿠토상 머리가 처음부터 흰색이었다면 굳이 내가 티를 내지 않아도 보쿠토상에게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같은 검은색이라니. 나보고 속앓이 하다가 나가 죽으라는 건가... 내년이면 3학년들은 졸업하고 학교에서도 더 이상 볼 수 없는데 나가 죽으라는 거지 뭐... 내가 어떻게 먼저 나서서 고백을 할 수 있겠어... 티도 못 내겠는데...

 "괜찮습니다. 요즘 조금 잠을 못 자서 그런 거 뿐입니다."
 "헤이 헤이 헤이!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기대라구 아카아시!!"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보쿠토상."



-



 아, 그리고 가끔씩 어디서 이상한 걸 듣고 와서는 나한테 이런저런 얘기들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가슴이 무거워지면서 텅 빈 거 같은 게 내 머리가 보쿠토상과 같은 검은색이라는 게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다. 그중에 언제가 제일 그랬냐면,


"아카아시! 우리도 손깍지 같은 사이네??"
 "...네?"
 "손깍지를 잡고 있으면 상대가 힘이 빠질 때 내가 더 힘을 꽉 줘서 잡게 되잖아? 정말 징그럽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거고, 그냥 다 귀찮고 힘들고 팍! 놓아 버리고 싶고 엄하다 잔인하다 생각할 때도 있겠지만!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는 사이지!! 꼭 같이 있어야만 하는 사이!!!"
 "아,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보쿠토상."
 ...진짜로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는 그런 사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보쿠토상.



-



 삐 - 삐 - 삐 - 삐 -
 탁!
 "으아~ 후... 하아..."

 정~~~말 일어나기 싫은 아침이다. 이불도 다리도 형광등 불빛도 물소리도 문고리도 공기도 말 소리도 전부 다 무겁다.
 이젠 보쿠토상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익숙해지고, 보쿠토상이 졸업을 하고 내 앞에서 사라져도 금방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게 또 아닌가 보다.
 즐거워야 하는 졸업식. 축하하고 기쁨이 가득해야 할 졸업식.
 보쿠토상 앞에서 울지 않을 수 있을까?



-



 "보쿠토상 졸업 축하합ㄴ..."
 "아카아시~~~!!!!! 어디있었어?? 계속 찾았는데!"
 "아. 죄송합니다. 체육관에 좀 가 있었습니다."
 "헤엑! 아카아시 이런 날에도 연습이야?? 이런 날엔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구요 아카아시 케이지군~~~"
 "충분히 즐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 저녁에 오는 거나 잊지 마세요. 축하는 그때마저 하는 걸로 하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친구들이 기다려요 보쿠토상"
 "알았어 아카아시!! 좀 있다 봐~"
 잘 했어. 잘 했어. 잘 했어.
 좀 있다가도 잘 하자. 오늘 하루만.
 오늘만.








 저녁에 배구부끼리 모여 축하하는 자리는 꽤 재밌었다. 그냥 내가 보쿠토상을 좋아하지 않았던 거처럼 아무 느낌도 없었고, 학교에서처럼 북적 시끌한 분위기가 싫지 않았다.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날 중에 이때가 제일 편하고 거짓 없이 웃고 얘기하고 장난도 치고받을 수 있었다.
 내 안의 내가 오늘 하루 보쿠토상 없이 있던 시간 동안 기특하게도 잘 정리해 줬구나 했다.

 "안녕히 가세요 보쿠토상."
 "아카아시 너무 보고 싶을 거야." ㅠㅠㅠㅠㅠㅠ
 "알겠으니까 달라붙지 마세요."
 "아카아시 너무해!! 오늘 마지막이라구!!!" ㅠㅠㅠㅠㅠㅠㅠ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 가 봐야죠.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내일 또 연습도 해야 하고..."
 "...아카아시 울어?"
 "아니, 아닙니다. 그만 가주세요 보쿠토상."
 "밀지 마 아카아시. 나 봐봐."
 "싫습... 아파요 보쿠토상 놔주세요."
 "나 봐 아카아시."

 식당에서 나오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거울을 본 순간 안에서 나도 모르게 보쿠토상이랑 같이 있는 게 힘들었구나 했다. 눈물이 났다. 펑펑 울진 않았다. 그냥 눈물 흐르는 것처럼 머리색도 쭉 빠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요즘 들어 나 같지 않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맞다. 요즘 나는, 내가 아니다.

 "좋아해요. 좋아해요 보쿠토상. 코타로씨. 좋아합니다.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졸업 안 했으면 좋겠어요."
 "아카아ㅅ..."
 "나는 왜 보쿠토상과 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일까. 나의 성격은 왜 이러고 왜 말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걸까. 왜 우린 학년이 다르고 시간은 왜 이렇게 빠른 걸까. 항상. 항상 생각했어요. 보쿠토상이 저를 시도 때도 없이 귀찮을 정도로 저를 찾는 것도 부르는 것ㄷ..."


 "...아카아시. 우리 이제 머리 색 돌아왔네?"
 "뭐, 뭐, 뭐, 뭐 하는...!"
 "아! 아파 아카아시!!
 나, 다 알고 있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카아시가 내 머리 색이랑 같아졌는걸! 그리고 나도, 아카아시의 머리 색이었고."
 "...언제부터 눈치채신 겁니까...? 왜 먼저 얘기하지 않았어요..."
 "무서웠으니까. 내가 아니면 어쩌지 무서웠으니까."
 "저는, 저는...몰랐어요...보쿠토상 머리 색이,"
 "그야 지금까지 아카아시 나를 제대로 못 쳐다봤으니까!! 머리색을 눈치 못 챘어도 알았을 거라구? 다른 애들도 다 알고 있을걸??"
 "으ㄱ...! 그거야!!"
 "헤헤."
 "...자꾸 이렇게 갑자기 껴안고 하지 말아주세요. 아까도 갑자기...갑자기...그..."
 "그때는 아카아시가 펑! 터질 거 같았다구!!"
 "......"
 "아카아시."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니 아카아시 나 봐봐. 빨리!!"
 "..."
 "헤헤. 아카아시는 눈동자 색도 예쁘네. 코도 예쁘고, 입술도 예쁘고, 목선도, 손도, 어디를 봐도 다 예뻐."
 "또 무슨..."
 "아카아시가 내 머리 색을 하고 있을 때도 예뻤는데 역시 아카아시 머리 색이 더 어울리고 더 예뻐."
 "알겠으니까 그만하세ㅇ..."
 "케이지. 케이지 케이지 케이지 케이지 케이지 케이지!"
 "...숨 막혀요 보쿠토상..."
 "케이지."
 "그만 부르세요."
 "케이지 한 번 더 불러줘."
 "............코타로씨"


 










 손깍지.
 처음 잡기까진 꽤 시간이 걸리지만 성공하고 나면?
 하하. 이 기분은 이 세상의 말론 표현하지 못 할 거다.

 얼마나 좋아? 손깍지 라니! 절대 내 옆에서 떼놓지 않겠다는 거잖아!! 한쪽이 잡을 힘조차 없이 흔들거릴 때 다른 한쪽이 더! 쎄게! 잡아 와! 그럼 그 힘으로 버티는 거야! 영원히!!

 둘의 합의하에 깍지를 풀기 전까지.













-
 "근데 진짜로 다른 사람들도 알았을까요?"
 "음?! 글쎄??"